양승욱 (지은이), 소제 (옮긴이) 인공위성82 2023-11-03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XfvGomcsrIX7U_TVwq3ooDqF8OGISyOa&feature=shared
어쩌면 작가란 망각이라는 대상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전사가 아닐까. 쏟아지는 자극과 풍경 속에서 시선을 붙들어 놓기란 절대 쉽지 않다. 연이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누군가의 고개를 돌려놓는다 해도, 숨 돌릴 틈 없이 새로운 볼거리를 꾸며내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잊히고 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양승욱은 거친 물결처럼 휘몰아치는 망각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사람들은 양승욱을 ‘장난감 작가’로 기억한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실천과 작업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이 하나가 되어, 그는 끊임없이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분주했던 작업의 경로가 무색하게, 부끄럽게도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은 ‘장난감 작가’라는 이름 외에 그의 다른 작업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장난감’이라는 단어는 그의 다양한 작업 주제 중에서 유독 자주 붙는 수식어이자, 어쩌면 그의 작업 세계를 가장 편협하게 규정한 소재이다. 만약 우리가 알록달록한 사진의 프레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면, 양승욱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사진집 [사물의 기억법]의 첫인상은 그의 의도를 궁금하게 만든다. 장난감에서 더 이상 ‘가능성’을 찾을 수 없어, 단지 ‘장난감 작가’로 굳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그가, 왜 장난감으로 뒤덮인 표지를 선택했을까? 작가가 지향했던 방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서문에 따르면, **[사물의 기억법]**은 그에게 일종의 경계석과 같다. 장난감으로 이뤄진 작업과 그 내포된 서사를 남김없이 털어놓음으로써, 그는 미련이나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새로운 상태로 거듭나고자 했다. 마치 장례식에서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풀어내듯, 이 책은 그의 초기 작업부터 시작해 장난감이라는 소재에 집중해 온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어린 시절 뇌리에 박힌 단순한 사건이나 사물로부터 비롯된 작업은 이윽고 재구성된 상황과 풍경으로 확장된다. 사진이 촬영된 이후 추가된 작가의 이야기는 균일하게 펼쳐지거나 빼곡히 사물로 채워진 연극의 한 꺼풀을 벗겨내고, 어느새 우리 앞에 바짝 다가선다.
장난감은 유년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물이다. 장난감을 거들떠보지 않는 이들이라도, 어릴 적 한 번쯤은 요란한 합성 섬유나 플라스틱 덩어리가 자신의 목숨이나 부모보다 소중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장난감은 미성숙한 시기에 우리와 함께 머무르며, 무의식 저편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자리한다. 장난감은 즐거움을 제공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그 소임을 다하면 창고에 처박히거나 좀처럼 다시 꺼내보지 않기도 한다. (섹스토이를 다시 꺼내본 적이 언제더라? 가물가물하다) 우리가 소유한 장난감은 변하지 않는다. 그 시기에 그대로 머무르기에, 안전하게 유년기를 졸업한 우리들의 장난감은 색만 바랜 채로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표로 남거나, 대부분 버려진다. 이유가 어떻든 장난감의 탓은 아니다.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해낼 로봇 조종사나, 차마 말 못 한 비밀을 품은 마법 소녀가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꿈을 바라다 허물처럼 내팽개친 우리가 문제일지는 몰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작가가 오랫동안 장난감이나 퀴어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작업을 발표해 왔지만, 그것이 그의 삶과 기억에서 벗겨낸 수많은 장면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장난감을 통해 게이들의 크루징이나 그 밖의 소수자 적 실천을 떠올리게 하는 , 같은 대표적인 연작은 자칫하면 그가 퀴어와 장난감으로 한정된 세계에 머무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작가는 자신의 생애 주기를 주마등처럼 스쳐 간 기억을 기반으로 꾸준히 작업을 발표해 왔다. 이미 양승욱은 알록달록한 장난감의 세계 밖의 풍경을 제시해 왔었다. <위수지역>, <수봉괴담>, 시리즈에서는 낡은 심상과 발가벗겨진 듯한 황량한 풍경이 주를 이룬다. <토이 스토리>에서 장난감들의 주인이 몰랐던 알록달록한 세계 속에서 튕겨 나온 후, 황량한 광경 속에서 밝게 빛나는 플래시-햇살은 다시 명랑한 장난감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종용하듯 숨을 조여온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가 그를 장난감-작가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지 그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 늘 겁 많고 소심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지만 그런 자신을 너무 미워하진 말자. 어쩌면 그 덕에 이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고 숨이 붙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